혈액검사는 건강검진과 질병진단 시 반드시 거쳐야할 기초 관문이다.
세포의 수와 모양, 호르몬 및 대사물질 수치 확인을 통해 빈혈, 당뇨부터 암, 치매까지 다양한 질환 유무를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전문장비와 인력을 갖춘 대형 병원에서만 검사가 가능해 평소 환자들의 접근이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이에 한국생산기술연구원 김현종 수석연구원이 집 근처 보건소와 소형 병원에서도
바로 혈액검사를 받을 수 있도록 별도의 전처리 과정을 없앤 고감도 혈액분석 기판 개발에 나섰다.
혈액은 우리 몸의 전신을 순환하며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하고 노폐물을 운반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 신체 기능 유지에 필수적인 호르몬과 면역 항체도 생산해낸다. 그래서 혈액검사만 잘 해도 몸의 이상 유무를 제 때 확인할 수 있으며, 검사결과는 건강관리 모니터링의 지표가 된다.
그런데 모든 혈액검사에는 생각보다 번거로운 과정이 따른다. 혈액에서 적혈구·백혈구와 같은 혈구세포를 분리하고 담황색의 중성액체인 ‘혈장’만 추출하고 농축시키는 전처리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때 주로 활용되는 원심분리법은 전문 인력과 장비, 그리고 많은 비용과 시간이 수반된다. 그래서 집에서 가까운 의원이나 보건소보다 대형병원에서 진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현실적으로 동네 의원과 보건소에서는 병원 규모나 운영 측면에서 전문 혈액검사를 수행할 여건이 되지 않습니다. 반면 대형병원에서는 MRI, 내시경 등의 장비로 더욱 세밀하게 진단할 수 있어 혈액검사의 필요성이 적은 편이죠. 결국 질병의 상시 모니터링이라는 혈액검사 본연의 기능이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만약 혈액분석 처리 과정이 간소화된다면, 동네 의원에서도 혈액검사를 활용한 질병의 예후 관리가 가능해져 시민들의 건강관리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한국생산기술연구원(이하 생기원) 뿌리기술연구소 친환경열표면처리연구부문 김현종 수석연구원은 이 점에 착안해 보다 간편하면서도 신속하게 혈액을 분석할 수 있는 고감도 ‘표면증강라만산란 기판’ 개발에 나섰다.
표면증강라만산란 기판에 혈액을 떨어뜨려 분석하는 모습. ⓒ한국생산기술연구원
먼저 김현종 수석연구원의 기술을 이해하기 위해선 ‘표면증강라만산란’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빛이 물질을 통과할 때 나타나는 고유의 스펙트럼을 라만산란 신호라 하는데, 이 신호가 금·은과 같은 금속 나노구조 표면에 닿았을 때 수십억 배 증폭되는 현상이 바로 ‘표면증강라만산란’이다. 이 현상을 활용해 혈액을 금속 기판에 놓고 특정 파장의 레이저를 조사하면, 이 때 발생되는 빛의 산란으로 혈액의 성분들을 분석할 수 있게 된다. 특히 금속 나노구조가 정교해질수록 라만 산란 신호가 증폭되어 고감도 분석이 더욱 용이해진다.
표면증강라만산란 기판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김현종 수석연구원. ⓒ한국생산기술연구원
“표면증강라만산란 현상을 활용하면 아주 낮은 농도의 물질들을 효과적으로 검출할 수 있습니다. 특히 수분이 다량 포함된 혈액이나 세포, 식품 등의 분석물에 대해서도 수분 신호의 방해 없이 증폭할 수 있어 고감도 분석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죠. 독극물 및 화학성분 분석은 물론, 최근에는 질병 진단을 위한 바이오마커나 변이 세포 검출 등 의료분야에도 적극 활용되는 추세입니다.”
연구팀은 이 같은 표면증강라만산란 현상을 혈액검사에 적용할 수 있는 특수 기판을 독자적으로 개발해냈다. 이 기판은 크게 상단의 ‘혈액 전처리 분리막’과 하단의 ‘수직배향 다공성 금속박막’이 상하로 층을 이루는 일체형 구조로 제작됐다. ‘혈액 전처리 분리막’은 혈액에서 혈장을 추출하는 원심분리 과정을, ‘수직배향 다공성 금속박막’은 기존 복잡한 증폭과정을 각각 대체해 간소화하는 역할을 한다.
“개발한 특수 기판은 혈액 전처리 분리막 아래에 수직배향 다공성 금속박막을 도금한 것이 특징입니다. 그래서 분리막에 혈액 몇 방울만 떨어뜨리면, 혈액이 분리막을 통과하면서 혈구 세포들이 분리되고 혈장만 수직배향 다공성 금속 박막의 기공 내부로 넘어가게 되죠. 이후 박막 내 나노 기공들에 레이저를 조사하면, 표면증강라만산란을 일으켜서 혈장에 포함된 성분들을 고감도로 검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혈구 세포들이 걸러지고 혈장들만 금속 박막에 모여 있는 기판 내부 모습. ⓒ한국생산기술연구원
따라서 이 기판을 활용하면 혈액검사 전처리 과정이 매우 간소화된다. 혈액만 기판에 떨어뜨리면 원심분리기 장비 없이도 검사를 방해하는 혈구세포들을 스스로 알아서 걸러주기 때문이다. 또한 채혈 대신 당뇨 혈당 체크하듯 몇 방울의 혈액만으로도 검사를 손쉽게 진행할 수 있으며, 검사결과도 5분이면 충분할 정도로 빠르게 나온다. 아울러 표면증강라만산란 효과 덕분에 대형병원에서만 가능했던 증폭 과정도 매우 용이해져 정밀한 혈액분석까지 가능해진다. 동네 의원이나 보건소에서는 단지 개발된 기판에 레이저를 쏠 수 있는 소형 라만분광기만 갖추면 된다.
표면증강라만산란 기판의 혈액을 분석하고 있는 김현종 수석연구원
이 같은 개발 성과의 배경에는 수직배향 다공성 금속박막의 기공 크기를 수 나노미터 수준으로 만들고 제어할 수 있는 ‘전해 도금 기술’에 대한 연구팀의 노하우가 녹아 있다. 전해 도금이란 전기 분해의 원리를 이용하여 금속 표면에 얇은 박막을 입히는 기술인데, 10 나노미터 이하의 미세 기공을 수직으로 배열하는 방법으로는 현재 유일하다고 알려져 있다.
“기판의 제조공정은 생각보다 간단합니다. 먼저 상용 혈액 분리막 표면에 수십 나노미터 두께의 금을 증착시킵니다. 다음으로 계면활성제의 자기조립1) 특성을 이용해 전해 도금 작업을 하면, 나노 기공을 수직으로 쌓아올릴 수 있는 거죠. 한편 초기 도금 속도가 매우 낮은 무전해 도금 방식을 쓰면, 기공 크기도 나노미터 단위로 제어할 수 있습니다. 분석 대상이 되는 질병의 종류에 맞춰 기판을 맞춤형으로 제작할 수 있다는 뜻이죠. 현재는 노인분들이 지속적으로 검사와 진단을 받아야 하는 주요 만성질환인 당뇨, 치매, 심장질환 등을 대상으로 전용 기판을 만들고 검사정확도를 향상하기 위해 연구 중입니다.”
1)자기조립 : 계면활성제 분자들 간의 상호작용에 의해 자발적으로 조직적인 구조나 형태를 형성하는 현상
모든 병은 더 커지기 전에 빠르게 진단하고 치료를 시작해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혈액검사는 그 진단의 시작점이다. 김현종 수석연구원은 동네에서도 혈액을 수시로 모니터링 할 수 있는 의료 기반이 구축되어 환자들이 병원 갈 시점을 놓치는 일이 없길 바란다고 말한다.
“표면증강라만산란 기판이 상용화되면 동네 의원이나 보건소에서도 혈구 세포를 분석하는 전문 혈액검사가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건강상태를 수시로 모니터링 할 수 있어 이상징후를 조기 발견하고 질병이 중증으로 가는 확률을 낮출 수 있습니다. 특히 대형병원을 이용하기 어려운 도서산간 지역 주민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궁극적으로는 개인의 의료비 부담을 낮추는 한편, 소형의원과 대형병원 간 역할 분담에 기여해 국민 건강증진과 의료체계 효율화에 이바지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국민 모두가 건강한 100세 시대, 혈액검사가 우리의 일상으로 자리 잡을 때 비로소 시작되지 않을까 예상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