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생산기술연구원

불길이 솟구치는 화재 현장. 한 사람의 생명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소방관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화염 속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화재 사고가 발생한 현장은 언제나 여건이 좋지 않다. 구석지거나 좁거나, 혹은 높은 곳이거나 찾기 힘든 곳이다. 게다가 이처럼 열악한 환경 속으로 무거운 산소통을 들고 들어가야 한다. 소방관의 체력이 급격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누군가 소방관의 산소통을 대신 들어준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한결 가벼운 몸으로 불길에 휩싸인 사고 당사자들을 구할 수 있다. 마치 상상에 그칠 것 같은 이러한 기술이 드디어 현실이 됐다. 소방관 전용 웨어러블 로봇 ‘하이퍼 R1’이다.

입는 것만으로 기운이 솟아나는 비밀

사람들의 꿈이 현실이 됐다. 생기원 로봇그룹 장재호 수석연구원팀이 입는 로봇 ‘하이퍼 R1’을 개발했다. ‘하이퍼(HyPER)’란 이름 그대로 유압(Hydraulic) 시스템을 지닌 외골격(Exoskeleton) 구조의 로봇을 의미한다. 하이퍼 앞에 ‘입는 로봇’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이유는 말 그대로 사람이 직접 ‘입을 수’ 있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장재호 수석연구원팀은 지난 2010년 하이퍼 1호를 개발하며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마치 영화 속에서나 볼 법한 ‘입는 로봇’을 개발했다는 점에서 학계뿐 아니라 일반 대중까지 상당한 관심을 드러냈다. 그로부터 약 6년이 지난 지금, 장재호 수석연구원은 개발을 더욱 심화시켰고 업그레이드 된 3.5 버전 소방관용 근력 지원 로봇 ‘하이퍼 R1’을 선보였다. 2010년 하이퍼 1호가 원천기술 개발 단계였다면, 최근 만들어진 ‘하이퍼 R1’은 상용화를 앞둔 소방관 전용 웨어러블 로봇이다. ‘하이퍼 R1’을 착용한 후 나타나는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힘이 세진다는 점이다. 이는 기존의 하이퍼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무게가 대폭 절감되고 여러 가지 골격 설계 시스템이 더욱 정교해졌다는 점에서 기존 하이퍼와는 두드러진 차이가 있었다.

더욱 정교해지고 세심해진 ‘하이퍼 R1'

업그레이드 된 ‘하이퍼 R1’이 개발될 수 있던 데는 세 가지 핵심 기술이 크게 작용했다. 첫 번째가 ‘의도인식 시스템’, 두 번째는 ‘외골격 시스템’, 마지막으로 ‘소형 동력원 기술’이다. ‘의도인식 시스템’이란 사람의 의도를 센서를 통해 미리 인식하는 것을 일컫는다. 해당 시스템을 거치면 왼쪽으로 갈지 오른쪽으로 갈지 등 사람의 이동 방향을 근육의 움직임으로 미리 예측할 수 있다.

그 후에는 사람의 움직임과 함께 로봇이 움직인다. 이 과정이 효율적으로 이뤄지게 돕는 기술이 ‘외골격 설계 기술’이다. 하이퍼는 사람이 로봇을 입고 동작 버튼을 누르면 그제야 움직이는 구조를 갖는다. 때문에 마치 옷처럼, 작동자의 인체 및 움직임 패턴에 맞추는 게 중요하다. 사람의 관절과 함께 움직여야 한다는 의미다. 장재호 수석연구원에 따르면 인체 관절의 회전축은 몸 안에 있다. 예를 들어 무릎의 회전축은 무릎 안쪽에 자리 잡고 있으므로 하이퍼의 외골격 역시 여기에 맞춰 설계돼야 한다. 헌데 이 과정이 결코 만만치 않다. 무릎의 경우 굽히고 펴는 것 외에 다른 움직임은 없으므로 회전축을 계산하는 것이 그나마 쉽지만 엉덩이의 경우 이야기가 다르다. 중심축이 골반 안쪽에 자리 잡고 있을 뿐 아니라 자유도가 많아 이를 계산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힘의 중심축에 따른 자유도를 연구에 잘 활용하기 위해서는 데이터를 가능한 많이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축적된 데이터 양이 기술의 결과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장재호 수석연구원팀이 타 연구팀에 비해 더 큰 경쟁력을 갖고 있는 이유 역시 상당한 양의 데이터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소형 동력원 역시 하이퍼 기술의 핵심 중 하나다.

하이퍼가 구동될 때 사용하는 에너지는 배터리에 있다. 그렇기에 적은 에너지를 사용함으로써 배터리 소모를 줄이는 기술이 관건이다. 장재호 수석연구원팀은 오랜 연구 끝에 배터리 절약 방식을 개발, ‘하이퍼 R1’의 경우 이전 모델에 비해 약 50% 이상의 에너지를 절감할 수 있다. 중력 원리를 활용하는게 핵심이다. 예를 들어 계단을 오르는 동작에서, 다리를 들어올릴 때는 에너지를 사용하고 다리를 내릴 때는 에너지를 축적한다.

시행착오가 곧 경쟁력… 동력원 더욱 소형화시킬 것

이처럼 사람이 힘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게 돕다보니, 하이퍼의 사용처 역시 점점 확대될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지금까지는 조선, 국방, 자동차, 소방 산업 등의 활용이 두드러졌다면 앞으로는 노년층의 활동 및 환자들의 재활을 돕는 데도 검토되고 있다. 무게 역시 계속 절감되고 있어 더욱 간편하고 손쉽 게 응용할 수 있는 여지가 열리고 있다. 하이퍼가 만들어진 초기에는 무게가 110kg에 달했지만 ‘하이퍼 R1’은 무게를 25kg까지 줄였다. 연구팀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15kg까지 감량하는 것을 목표로 추가 연구를 진행 중이다.

하이퍼와 같은 입는 로봇을 개발할 수 있는 국가는 국내를 비롯해 미국과 일본 등 세 곳이 전부다. 국내 연구진의 기술 수준 역시 미국과 일본에 비교했을 때 전혀 뒤처지지 않으며 영상을 공개하고 일반인을 대상으로 직접 착용할 수 있게 시연하는 곳도 생기원이 유일하다. 이번 기술 개발은 연구진의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장재호 수석연구원 역시 ‘하이퍼 R1’ 기술의 가장 큰 경쟁력에 대해 ‘수없이 경험한 시행착오’ 라고 답했다. 그 과정이 곧 시간과 자금의 투자였다는 의미다.

이러한 투자와 노력의 결과물인 ‘하이퍼 R1’은 현재 그 경쟁력을 인정받아 국제소방안전박람회에 참여, 상용화를 기다리고 있다. 앞으로 연구팀은 동력원을 더욱 소형화하는 기술을 만들고, 소프트 로보틱스를 적용한 외골격 설계를 만드는 데 주력할 계획이다. 연구가 성공적으로 이뤄져 로봇의 보급 가격이 낮춰진다면 산업 전반에 큰 변화가 올 것으로 보인다. 노동 연령을 늘릴 수 있을 뿐 아니라 산업 재해를 줄일 수 있고 무엇보다 노인과 노약자를 위한 보조기술로 활용돼 고령화 사회를 대비하기 위한 장비로도 사용될 수 있다.

로봇기술을 선도할 가장 ‘핫’ 한 아이템으로 주목받고 있는 하이퍼. 장재호 수석연구원은 앞으로 기술개발에 박차를 가해 시장이 더욱 확대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 전했다. 하이퍼는 본격적인 웨어러블 로봇을 만들기 위한 출발선에 있는 기술이다. 장재호 수석연구원은 그렇기에 앞으로의 가능성이더욱 무궁무진하다며 미래가 더 기대되는 기술이라고 강조했다.